연극, '맨 프럼 어스' - 구성의 문제인가, 연기의 문제인가
연극을 보는 제 주관적인 해석과 연극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맨프럼어스
최용훈 연출, 문종원, 박해수, 여현수 외 출연, 2014.
레이니아입니다. 또 오랜만에 연극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이번에는 대학로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맨프럼어스라는 연극인데요. 지인이 표가 생겨서 저는 덤으로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대학로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는 말에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연극과 관련된 정보를 많이 주워듣진 않지만, 가끔 우연한 기회로 플레이디비나 예매사이트에 들어가 보곤 하는데, 눈에 자주 밟히는 작품이 바로 이 '맨프럼어스'였습니다.
제 생각은 대개 이런 연극이 꼭 실망하곤 하는지라 걱정하면서 연극을 보고 왔는데요. 보고 와서 지인과 제가 평이 좀 많이 갈렸습니다. 그리하여 정리해보는 연극, <맨프럼어스>입니다.
Man from Earth
처음 '맨프럼어스'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어스(Earth)가 우리(Us)라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요. 연극의 제재가 '14,000년을 살아온 남자'라서 제목이 맨프럼어스(Man from Earth)라고 합니다.
동명의 미국 영화가 독립영화의 형태로 이미 나왔으며, 연극 <맨프럼어스>는 이를 극작하여 만든 작품이라고 합니다. 국내엔 개봉하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평단의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네요. 영화의 요소를 살펴보면 확실히 연극으로 만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은 인원이 등장하고, 장소의 전환이 없으며 이야기로만 사건이 진행되는 등... '독립영화'이기 때문에 해야 했던 시도들이 현실적인 제약이 있는 연극의 특성에 잘 부합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연극의 시놉시스는 간단합니다. 존 올드맨(John Oldman)이라는 교수가 종신 정교수 자리도 마다하고 떠날 준비를 합니다. 학교에 들어온 지 꼭 10년 만의 일인데요. 갑작스러운 결정에 놀란 주변 교수는 이유를 물으러, 동시에 환송하기 위해 그를 찾아갑니다.
(커튼콜의 일부, 커튼콜만 촬영이 허용되었습니다.)
무슨 이유로 갑자기 떠나느냐는 친구들의 말에 그는 진지하게 '사람이 14,000년을 살아왔다면 어떠한 모습이겠느냐?'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14,000년을 살아온 인간이라고 밝히죠.
이 폭탄 고백에, 그의 친구이자 심리학, 생물학, 고고학, 인류학, 미술사학 교수는 그 말을 듣고 저마다의 반응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려고 합니다. 이 질문은 점차 게임의 형식을 띠고 점점 복잡한 주제로 넘어갑니다...
시놉시스만 보고 상당히 흥미로웠는데요. 실제의 연극은 어땠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린다 교수와 아트)
구성과 균형
연극 전체적인 구성은 무척 그 완성도가 뛰어납니다. 이미 검증받은 각본을 바탕으로 연극을 만들었기 때문일까요? 연극의 흐름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발한 상상력과 이를 풀어가는 과정이 대단합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단순하게 답할 문제를 많이 고민한 흔적이 엿보였습니다.
가령, 일반적으로 14,000년을 살면 신과 비슷한 전지적 존재가 되리라 쉽게 예상하지만, <맨프럼어스>에선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이유는 인간 기억의 한계와 시대가 바뀌면서 여태까지 가지고 있던 지식이 더는 쓸모없는 지식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무척 타당한 설명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연극을 보면서 어색함을 느꼈습니다. 배우들의 동선이 제멋대로고 우왕좌왕하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이어서 설명할 배우의 연기 문제도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요소가 연극에 '맥거핀'처럼 끼어있기 때문입니다.
(존 올드맨, 그의 정체는 만사천년을 살아온 인간이었습니다.)
제가 유독 어색하게 본 부분은 '일꾼'이라 부르는 배역의 등장입니다. 무대 장치를 조금씩 손보고 가는데, 무대 장치를 바꾸는 사건을 암전 없이 진행하는 데 필요한 조치라고 하지만, 뜬금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배역까지 정해가며 꼭 필요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일꾼이 인물들의 대화를 듣고 반응하는 것도 개그를 노린 건지 모르겠지만, '도대체 어쩌라고?'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일꾼의 반응이 뭔가 복선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남아서 끝까지 신경 쓰였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지만요.
또 '이디스' 미술사 교수가 종교에 관한 논쟁을 하는 것도 짜증 나면서 어색했습니다. 약간 편향적인 종교관을 갖고 있으면서 미술사를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이 좀 놀라웠다는 생각은 두고, 자신의 종교관을 울부짖는(?!) 모습은 보기 힘들었습니다.
(보면서 답답했던 이디스 교수)
그러다 마지막에는 반쯤 구걸하는 태도로 인간과 신, 그리고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게 참 쓸데없이 현학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함께 본 지인이 '영화의 구성은 그대로 따랐지만, 극작의 과정을 거치며 살짝 덧붙여진 곳이 있다.'고 하더군요. 영화를 보진 않았으나 아마 이곳이 그 '사족'이 아닐까 합니다.
연기
어지간해서는 배우의 연기를 가지고 왈가왈부하진 않지만, 이번에는 꼭 이야기를 꺼내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제가 본 타임의 공연에서 '샌디'역할은 진짜 끔찍했어요.
공연을 보면서 이처럼 공연 자체를 낯설게 보게 하는 배우는 없었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전혀 사랑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고, 마치 자리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같이 연극에 '놓여'있더군요. 소극장 연극도 아니고 이처럼 큰 규모의 연극에서 이러한 경험은 무척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역할이 공기 같은 배역도 둘이나(일꾼/경찰) 있는데, 여기에 나와야 할 역할이 연극을 부유하고 있으니 연극을 보는 저로서는 복장 터질 일이었습니다. 지인이 불러서 함께 갔기에 망정이지, 제가 돈 내고 보러 갔으면 이보다 훨씬 격렬한 후기를 썼을 겁니다...
그리고 배우들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격렬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미리 들었음에도 배우들이 표현하는 분노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정이 사건의 진행에 따라 이어지는 게 아니라 갑자기 던져진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어요. 배우의 표현력이 문제인지 아니면 극이 제대로 쓰이지 않은 것인지를 구분하긴 어려웠습니다.
연극, <맨프럼어스>를 보고 지인은 흥미로운 소재를 바탕으로 구성이 잘 짜였다는 평가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로 격렬하게 토론을 했습니다만... 저는 글쎄요. 잘 짜인 구성을 가져와 오히려 그 완성도를 해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연극을 보면서 참신한 생각과는 별개로 여러모로 아쉬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전 4~5만 원에 이르는 푯값을 내면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몇 번 공연이 상연되고 먼 훗날에 조금 더 다듬어진다면 그때는 고려해보겠습니다. 지금은 애써 비싼 연극에 모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별도로 영화를 한번 찾아보고 싶네요. 그럼 지금까지 연극 <맨프럼어스> 후기의 레이니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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