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사물의 안타까움성' - 찡그리며 웃다.
글 작성자: 레이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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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보는 제 주관적인 해석과 연극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물의 안타까움성
쯔카구치 토모 연출, 전운종, 윤정로, 장율, 송철호, 고영민, 김수아, 김보경 출연, 2014
쯔카구치 토모 연출, 전운종, 윤정로, 장율, 송철호, 고영민, 김수아, 김보경 출연, 2014
레이니아입니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초대 받아 연극을 보고 온 감상을 간략하게 적어볼까 합니다. 예전엔 한창 연극 보는 취미를 들여서 한 해 동안 연극을 수 편 이상 보고 왔는데, 점점 다른 일이 바빠지면서 그리고 대학로에 애정을 쏟지 않으면서(!?) 연극을 보러 가는 일이 줄었습니다.
더불어 상업적인 데만 치중하여 기본적인 재미도 챙기지 못한 연극이 늘어나고, 제목만 바꾸어 낚시하는 연극부터 각양각색의 연극이 이런저런 수단으로 범람하고 있는데요. 이를 보고 있자면 연극에 문외한인 저부터도 거부감이 들어 쉽게 연극을 보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최근엔 연극을 보러 오길 청하는 곳도 몇 곳 있었으나 죄다 거절하다가 이번에 문득 초대를 받아 보게 된 연극이 오늘 감상을 남길 <사물의 안타까움성>입니다. 제목에 혹했고 책으로 원작이 나와 있다는 이야기에 혹하여 보게 되었는데요. 정리하는데 시간이 늦어 조금 늦은 타이밍에 글을 씁니다.
하지만 제가 글을 쓰는 스타일은 어설픈 감상보다는 조금 고민을 거쳐서 쓰는 스타일이고, 이러한 글을 보고 초대를 해주셨으리라 믿어 뒤늦게 감상을 남겨보겠습니다. 재빠른 홍보를 원하신다면 앞으로 다른 블로그를 초대해주세요…T_T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사물의 안타까움성
원작은 제가 아직 구해보지 못했습니다만, 연극을 보면서 대략 그 주제와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요. 어쨌든 연극 <사물의 안타까움성>은 많은 고민이 들어간 작품이고, 곰곰이 고민해볼 내용이 많습니다.
이리저리 찾아봤더니 ‘사물의 안타까움성’에서 ‘안타까움성’을 나타내는 단어는 네덜란드어로 helaasheid인데, 이는 ‘아, 유감이다.’ 정도의 감탄사라고 합니다. 혹자는 ‘사물의 안타까움성’이 너무 딱딱한 단어라고도 하지만, 전 꽤 재미있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유머는 줄었지만, 노스탤지어를 떠올리게 하는 적절한 단어라고 봅니다. 역자인 소설가 배수아 님의 멋진 센스라고 생각해요.
(베르휠스트 집안 사람들)
연극은 주인공인 디미트리가 자신의 유년시절을 소회를 밝히며 자신의 집안인 베르휠스트 집안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시작합니다. ‘별 볼 일 없는 어른이 되느니, 차라리 세계 최고의 술꾼이 되라!’를 주장하는 아버지와 삼촌들은 먹고 마시고 취하고 떠들고 추태를 부립니다.
그리고 디미트리는 이런 삼촌들과 함께 술 마시고(무려 어리니까 콜라를 타서!) 춤추고 떠들고 음탕한 노래를 부르고 다니고요. 하지만 디미트리가 인식하는 유년시절, 즉 연극의 무대는 끔찍하되 끔찍하지 않은 유년시절이었습니다. 적어도 그 속에서는 함께 웃고 떠들고 즐겼으니까요. 책에서는 이를 ‘그 당시의 나는 완전한 루저는 아니었고, 루저로 성장해 가는 길목에 있었다.’라고 표현했다고 하네요.
다시 말해, 관객 역시 <사물의 안타까움성> 무대에서 펼쳐지는 사건을 기본적으로 익살스럽게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술과 술꾼
(술은 빠질 수 없는 소재입니다.)
하지만 연극의 시작부터 술을 기운차게 흩뿌리는 장면은 제게 흥겨운 파티로 보기보다는 일종의 의식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이 연극이 일종의 의식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연극의 흐름을 놓치고 뒤늦게 생각해보다가 제가 생각하는 방향이 의도와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하다못해 관객에게 술을 권하는 등의 장치가 있었으면 조금은 더 의도한 바대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사건이 술과 함께 진행됩니다.)
술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후에 디미트리의 아버지는 클리닉에 들어가 술을 끊었다가 결국 술을 마시면서 파국을 맞습니다. 그리고 삼촌들도 술을 어마어마하게 마시고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사건 사고를 일으키죠. 술이라는 것은 베르휠스트 집안에 그다지 도움되는 게 없는 그런 물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술은 이들의 위치를 규정하는 매체가 되기도 합니다. 값싸고 저렴한 맥주는 프롤레타리아인 이들을 표현하는 데 더없이 좋은 수단이죠. 그리고 술에 취한 세상에서 보는 술이 깬 세상과 술이 깬 세상에서 보는 술에 취한 세상은 서로 애수감을 느끼게 합니다.
술을 통해 잠시 세상은 분리되고 즐겁고 행복한 기억이 남습니다. 술에 취하면 솟아나는 자신감은 ‘그래, 내일부턴 잘하자’라는 생각이 들죠. 하지만 술에서 깨고 나면 별 볼 일 없는 일상은 매한가지입니다. 다시 술에 취해 자신감이 넘쳤던 즐겁고 행복한 세계로 가고 싶죠. 결국, 각각의 세계 속에서 베르휠스트 집안사람들은 다른 세계를 그리워합니다.
(한편으로 다른 인물과 동일시하는 아버지도 있습니다.)
해학과 노스탤지어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술에 취해 부르던 음탕한 노래를 보존하기 위한 민속학자가 있는 자리에서 술판을 벌이고 나온 디미트리는 회고합니다. ‘아, 이 미칠 듯한 사물의 안타까움성이여…’라고요. 민속학자를 부른 자리에서 술판을 벌이고, 술 마시기 대회를 만들고, 과음 때문에 빠진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기념으로 술을 마시러 가는 등 베르휠스트 집안에서 벌어진 일들은 웃음 짓게 합니다.
(이 시절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제 삼자가 보았을 때, 약간은 찡그린 표정으로 지을 수밖에 없는 웃음을요. 하지만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린 디미트리가 회고했을 때 그 시절은 그에겐 그립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인생의 한 조각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모든 것들이 디미트리에겐 ‘안타까움’으로 돌아왔고, 모든 사물이 가진 그 ‘안타까움성’을 느끼며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연극 <사물의 안타까움성>은 디미트리의 유년시절을 보고 함께 웃을 수 있을 때, 어른이 된 디미트리를 따라 지나간 인생의 기억을 안타까워하고 지긋지긋하지만, 다시 누릴 수 없음을 ‘사물의 안타까움성’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된 디미트리가 느끼는 사물의 안타까움성)
곰곰이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즐거운 연극이었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연극은 책을 함축적으로 담는 바람에 주제로 향하는 길이 조금은 불친절했다는 점입니다. 이 불친절함을 이겨내고 이들의 삶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며 웃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모두 사물의 안타까움성을 조금은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인상 깊은 연극이었고요. 뮈리엘 바르베리의 <고슴도치의 우아함>이 떠오르는 연극이었습니다. 다소 어려웠지만, 곱씹어봄 직한 연극이었습니다. 다시 상연하게 된다면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디미트리를 만나보세요. 아마 살짝 찡그리며 웃음을 지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지금까지 연극 <사물의 안타까움성> 후기의 레이니아였습니다.:)
"위 <사물의 안타까움성>을 추천하면서
공연기획사 컬처버스로부터 연극 티켓을 제공 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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