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행복' - 부족한 설정은 어떻게 감정 과잉을 불러오는가?
글 작성자: 레이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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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보는 제 주관적인 해석과 연극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극 행복
정세혁 연출, 임천석, 장준휘, 김가현, 김보람, 김희성 외 출연. 2015.
레이니아입니다. 오랜만에 연극 리뷰를 적게 되었네요. 평생 볼 연극을 요 몇 년간 모두 봐버린 탓일까요... 무척 오랜만에 연극 초대를 받아서 다녀왔습니다. 이번에 초대받은 연극은 인기를 얻고 있다는 <행복>인데요. 평소 같으면 초대에 잘 응하지 않습니다만, 가감 없는 평을 원하셔서 오랜만에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대학로에 들러 주말 오후에 연극을 보고 왔습니다. 토요일이지만 오후라 사람이 미어터지진 않으리라 생각했는데요. 이게 웬걸. 구석까지 빡빡하게 찬 관객 때문에 몸을 웅크리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들게 보고 온 만큼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연극 <행복> 그 후기를 정리해보았습니다.
클리셰와 설정 구멍
연극 소개 중, 보고 나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연극이라는 소개를 보고 꽤 인상 깊었습니다. 어떤 내용이기에 이런 소개를 붙일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연극을 관람했습니다.
연극의 시작은 주인공이 각자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시작합니다. 최근 읽었던 글 중에서 '대학로 소극장 연극은 대부분 제4의 벽을 넘는다.'라는 문구를 보았는데요. 돌이켜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연극 <행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리기사역의 남편(임천석 분)은 손님인 관객에게 이런저런 연극의 사전 설정을 설명합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인데요.
이처럼 관객에게 말을 거는 것은 배우의 연기가 뒷받침되어야 잘 흘러갈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자연스러웠습니다. 특히 남편역의 임천석 씨가 연기를 능청맞게 잘하시더라고요. 그리고 개인적으론 이상하게 낯이 익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오늘의 캐스트, 임천석 배우님과... 다른 분은 캐스트표에 보이지 않네요.)
연극의 소재는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 남자와 웃거나 울면 죽게 되는 여자의 만남이었습니다. 소재부터 어떤 결말이 나올지 짐작할 수 있어서 당혹스러웠습니다. 지독한 클리셰의 조합이면 참신한 결말을 끌어내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결말마저 참신하지 않아서 한 번 더 당황했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TV에서 본 것 같아 살짝 찾아봤는데 알고 보니 어마어마한 설정 구멍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두 남녀의 병을 간단히 살펴볼게요. 우선 남성은 펀치 아웃 증후군으로 설명했던 것 같은데, 좀 찾아봤더니 만성 외상성 뇌병변(CTE), 혹은 권투 선수 치매(Dementia Pugilistica)로 불리더라고요.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아서 뇌 조직이 괴사하여 치매가 오는 것입니다.
또한, 여자가 걸린 병은 ‘코넬리아 디란지 증후군(Cornelia de Lange Syndrome)’입니다. 과거에 TV에 나온 전례가 있더라고요. 선천적인 병이며 치료 약도 없고, 치료가 어려워 불치병인데요. 문제는 환자가 성인까지 살아남은 전례가 거의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엄청난 문제가 발생하는데요.
여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인간의 감정을 거의 죽이고 살아와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게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목에 주사기를 꽂아야 하는 치료제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중에 진단을 받게 되는 후천적 질환은 더욱 아니죠. 그러니 그냥 상상 속의 병으로 보는 게 맞습니다.
남자만으로도 충분한 슬픔을 끌어낼 수 있는데, 어째서 여자의 설정을 그리 작위적으로 만들었는지는 관람객으로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설정의 극대화가 더 큰 슬픔을 보장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여러 모로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설정 구멍이 오히려 연극의 개연성을 파괴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작가가 설정을 끌어오면서 설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을 하고 극을 썼는지 의문이 드네요. 연극을 보면서, 그리고 보고 나고 글을 쓰면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왜 감정을 강요하는가?
연극 <행복>을 보면서 저는 꽤 불편했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이 감정 과잉으로 치닫기 때문인데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진부한 소재, 설정 구멍의 흔적을 덮고, 동시에 관객에게 슬픔을 강조하기 위해 연극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뻔한 내용이라 배우들이 연기할 게 없어 배우도 연기하느라 고생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처음엔 연기가 어색한 게 아닌가 싶었으나 연극을 보다 보니, 이건 극 구성의 문제지 배우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우들이 자신의 끼를 잘 살린 부분이 관장과 장모님이 나오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유감스럽게도 이 부분도 연극의 사족이라 생각해서 좀 아쉬웠습니다.
연극은 기승전결도 없이 이리저리 바다 위를 떠다니는 느낌입니다. 연극에 마땅한 주제가 보이지 않고 단순히 관객을 슬프게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표류하다 보니 자연스레 감정 과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코미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자꾸 ‘감동’ 코드를 넣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웃음과 슬픔의 감정의 폭이 커서 인상 깊게 느껴지기 때문일 텐데요.
마찬가지로 연극 <행복>에서도 우스운 장면을 넣으면서 감정의 진폭을 크게 만들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보이고, 진부하고, 몰입을 방해합니다. 관장과 장모님 나오는 부분이 대표적인 부분이겠고요. 우습기야 했지만, 그 웃기는 부분이 왜 극에 존재해야 하는지 당위성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심지어 결말마저 충격적이었습니다. 주사기를 들고 나가는 게 너무나 작위적이라 아주 어떻게 하겠다고 광고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편의점을 배경으로 과거 회상으로 이어졌다가 다시 현실로 이어지는 불분명한 결말은 끔찍한 사족이라 당장 잘라버리고 싶었습니다. 과거 회상에서 현실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 같지도 않고 제대로 이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큰 사건이 지나고 함께 이불 빨래하는 장면 정도에서 자르는 게 그나마 훨씬 바람직한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이든 극이든 군더더기는 과욕이고, 완성도를 해치는 요소입니다. 감히 첨언하자면 마지막 장면은 반드시 자르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감정 과잉 때문에 꽤 피곤해져서 다음 일정으로 이동했던 연극 <행복>입니다. 이 연극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행복보다는 이 둘 연인의 순수한 사랑을 엿본 것 같은데요. 저렇게 불쌍한 사람도 있으니 상대적 행복을 느끼라는 건가? 싶기도 했네요. 어쨌든 관객 멱살을 붙잡고 슬픔을 강요하는 연극이라 전 좀 보기 힘들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연극이 슬펐던 이유는 김동률의 ‘감사’라는 노래 덕분이었습니다. 이 노래라도 안 썼으면…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여담이지만, 연극이 슬펐던 이유는 김동률의 ‘감사’라는 노래 덕분이었습니다. 이 노래라도 안 썼으면…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캐스팅 표 중에서. 이렇게 훈남훈녀 배우를 모셔다두고 희곡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집에 들어와서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2010년에 임천석 배우를 <스페셜레터> 공연을 통해 본 적이 있더라고요. 벌써 시간이 5년이나 지났네요.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줄 서서 사인도 받았었는데 말이죠. 그때의 저는 풋내기, 지금도 풋내기.
초대까지 해주신 공연에 혹평하자니 마음이 아프지만, 좋은 배우를 제대로 빛나게 하지 못하는 희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배우나 연출의 문제라기보다는 희곡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많은 군더더기를 들어내고 기승전결의 흐름을 잡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글은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지금까지 레이니아였습니다.:)
"위 <행복>을 추천하면서 각설탕프로덕션으로부터 연극 티켓을 제공 받았음"
"위 <행복>을 추천하면서 각설탕프로덕션으로부터 연극 티켓을 제공 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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